이영도의 친필서한
일찍이 나는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흐르는 별똥을 향해 아픈 기원을 나누어 왔다.
우리들의 목숨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멀고도 창창한 영겁의 길을 동반할 수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죽음으로 하여 본의 아닌 배신을 그는 저질렀고, 남은 나는 함께 우러르던 그 날의 성좌를 버릇처럼 우러러 섰다.
이제 나는 유성을 두고 어떠한 원력을 세울 것인가.
- 「유성」에서
저간의 사랑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청마의 정운에 대한 사랑보다 어쩌면 정운의 청마에 대한 사랑이 더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엔 주위 정황으로 대놓고 말 할 수 없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이런 사랑의 고백서를 「유성」에서나마 내비쳤던 것이다.
밤마다 긴 세월을 뜬눈으로 밝히더니
아득한 꿈길처럼 기약 없는 그리움에
구만리 창창한 속을 뿌리치고 내려라.
- 정운의 「유성」 전문
1954년 첫시조집 『청저집』에 실려있는 시조이다. 1976년 유작집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유성」이라는 수필 뒷부분에 이 시조가 인용되었다.
정운은 1953년 부산 남성여자중고등학교, 1955년 마산 성지여자 고등학교, 1956년 부산여자대학교 강사를 거쳐 1964년 부산 어린이집 관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66년 제 8 회 눌원 문화상을 수상했다. 1954년 첫시조집 『청저집』, 1958년 수필집 『춘근집』, 1966년 수필집『비둘기 내리는 뜨락』 등을 출간했다.
1967년 청마가 교통사고로 급거했다. 죽음만큼 더 큰 상처는 없다. 여기서 정운은 운명의 굽을 틀게 된다.
1967년 정운은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발간했다. 이 일로 유족과 마찰을 빚었다. 미망인과 타협, 인세를 현대문학사에 넘겨 1969년 정운 문학상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청마와의 열애로 이목이 집중되자 정운은 10여년 간 애정을 쏟아왔던 애일당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전말은 이렇다. 박옥금으로 보내온 2001년 9월 25일 이근배의 ‘이영도와 나’의 서간을 요약한 것이다.
처음에는 청마와의 사랑을 지상에 공개하지 않을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간 한국>이 정운 과 청마와의 편지 얘기를 쓰자 다른 여성지들이 몇 편의 편지라도 잡지에 공개해줄 것을 줄기차 게 요청해왔다. 이영도는 거절했다. 여성지들이 청마와의 사랑의 편지들을 싣기 시작했다. 이영도 가 아닌 다른 여성들이 청마에게서 나도 편지를 받았다고 잡지사에 전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운은 청마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도 청마와의 사랑을 위해서도 막아야 한다는 절체 절명의 위 기 위식을 느낀 것이다. 청마가 바람을 피운 것은 사실이지만 청마의 사랑을 욕되게 할 수는 없 었다. 청마는 그런 속된 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다. 참사랑을 한 것이다. 그래서 공개를 결심했다. 이렇게 해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이 탄생하게 되었다.
정운의 청마에 대한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는 서한이다..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 정운의 「그리움」전문
생각을 멀리 할 수는 있지만 울컥 밀려오는 그리움은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다. 대상이 청마 말고 또 누가 있으랴. 사랑은 말로도 마음으로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청마 사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탑」은 절절하고 애절하기까지 하다. 사랑의 절창은 이런 것인가.
너는 저마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청마는 저만치 가고 정운은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하늘과 땅은 돌아서고 말았다. 죽음이 애모가 되어 사리로 맺혔다. 망부석과 다르지 않다. 신라의 박제상이 그랬고 백제의 정읍사가 그랬다.
청마의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저간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로 돌아갈 곳이란 없으며, 있다면 오직 죽어서 주검이나마 당신 곁에 가서 묻힐 뿐인 것입니다. 죽어서 내생에서나마 우리가 애틋한 부부로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 간구하는 당신 의 염원을 어찌 내가 모르겠습니까? (1962.5.27.)
유성을 바라보며 한 날 한 시에 영겁의 길을 같이 가자하고 빌었던 청마가 별안간 급거했으니 그 아픔이야 오죽했으랴. 먼저 간 사람을 배신자라고까지 말한 정운의 체념 또한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산다는 것은 인연인데 이 질기디 질긴 인연을 어찌할 수 없다. 이런 심정에서 정운의 「탑」이 나왔으리라.
청마의 사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또 하나의 작품 「절벽」이 있다.
못여는 문입니까?
안열리는 문입니까?
당신 숨결은
내 핏줄에 느끼는데
흔들고
두드려도 한결
돌아앉은 뜻입니까?
1970년 서울 마포구 서교동으로 이주,1971년 수필집 『머나먼 사념의 길목』 발간,1976년 3월 6일 뇌일혈로 사망했다. 한 많은 생애와 청마와의 사랑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김남환 시인의 ‘이 세상 떠나던 날의 이영도 선생’ 추억담 일부를 소개한다.
청천벽력이 떨어진 아침이었다.선생께서는 쓰러져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 고 나는 정신 없이 달려갔다. 중환자실로 막 들어서려는데 선생의 사위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산소 마스크를 쓴 선생을 구급차에 모시고 자택에 도착했다. 병원을 떠날 때 일러준 담당 의사의 지시대로 나는 선생을 반듯하게 뉘어놓고 팔에 링거 주사 바늘을 뽑고 마스크를 뗐 다. 선생은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그리움과 정한의 세계를 살아간 정운. 정운은 시조로 살다가 시조로 갔다. 그리고 청마를 사랑하다 청마를 보내고 청마처럼 갔다. 사람은 사랑으로 왔다 사랑으로 가는 법이다. 타의건 자의건 사람은 누군가가 먼저 갈 수 밖에 없다. 배신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언약』은 정운의 유작집이다. 정운은 서문을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다음날 영원히 청마 곁으로 떠났다.
1976년 8월 노산 이은상의 『언약』의 서문 일부이다.
사향노루가 지나간 뒤에는 발자국 닿은 풀끝마다 향기가 끼치듯이,그는 어디론지 가버렸건만 향 내 머금은 작품들이 남아 우리 가슴에 풍기고 있다. 길이 갈 것이다.
수필자 전숙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영도는 세기적인 열렬한 사랑을 한 분인데 말년에는 쓸쓸해졌다. 내가 입은 봄외투를 만져보 며 ‘참 곱다’ 하기에 ‘다음 미국에 가면 한 벌 사다 드릴께’ 하고 약속했는데 그만 돌아가셨다.
소설이다. 겨울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며칠을 봄비처럼 내린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뒤늦게 주룩주룩 내리는가. 눈발은 어디쯤 오고 있고 바람은 어디쯤서 밤 지새우고 있는가.
설악산엔 눈이 내렸다.
-출처:서예문인화,2015.12,128-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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