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문학’과 ‘연애’ (김행숙 시인)
한밤을 내내도록 머리맡 지붕 위에서 퍼득이며 보채어 우는 안타까운 울음소리에 나도 전전히 잠 한잠 못 이루고, 날이 밝아 일어나자 창을 열고 내다보니, 지붕 위 공중 기ㅅ대 끝 햇빛에, 어제 저녁 내리우기를 잊은, 울다 지친 아이처럼 까부러져 걸려 있는 물질 아닌 심상 하나
―― 유치환, 「심상心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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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가 문학적인 사건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던 때로 거슬러가 보면, 신청년들이 열렬하고 심각하게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풍경과 만나게 된다. 1910년대 말 1920년대 초는 “예술이냐? 연애냐?”(염상섭, 「암야暗夜」)라는 외침이 터져나오던 때였다. 한편에선 모든 소설과 시가 연애소설 연애시가 되어버렸다는 냉소도 있었지만, 이 냉소를 오히려 속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을 만큼 연애는 고상하고 고귀하게 칭송되었다.
김동인은 당대 소설의 주조主潮를 “사랑 없는 결혼은 제로”라는 표현으로 요약하기도 했고, 《백조》 동인들은 명월관이나 국일관 같은 요정 출입을 ‘순례’라는 낭만적인 용어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연애는 일종의 시대적인 유행이었으며, 전근대적인 사회를 향해 던지는 문제 제기의 형식이었고, 예술적인 초월의 계기로 고양되기도 했다. 그때의 연애는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인 선택에 가까웠다. 즉, 연애는 전근대적인 관습에 따르지 않고 근대적인 삶의 형식을 선택한다는 의지의 표명일 수 있었다.
따라서 연애로 인한 고민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 될 수 있었다. 비극적인 연애는 그 비극성으로 인하여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찬양되었다. 이광수가 「문학文學이란 하何오」에서 흥미를 주는 문학의 재료로 부모의 허락을 받을 수 없는 불행에 빠진 젊은이들의 연애를 꼽을 수 있었던 것은, 자아의 의지와 연애의 진실성을 그 불행한 조건이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청년들에게 연애는 순수하고 열렬한 감정이 가장 잘 표출되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비극적인 연애는, 오상순의 수사를 빌자면, “모든 사상思想과 억제抑制를 홍모鴻毛보다 경輕하게 충파衝破”하는 자아의 힘과 자발성을 드러내주는 계기였다. 여기서 이들은 “인생의 숭고한 미美”를 발견하였다.
당시에 문학 작품은 연애의 참고서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 한편에는 연애를 예술의 계기로 고양시키고자 한 문학청년들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에게 현실의 애인은 문학적인 발단에 불과했고, 이상적인 애인은 문학적인 피조물, ‘작품’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연애가 예술의 계기로 고양됨과 더불어 ‘낭만적인 사랑’은 근대의 아름다운 신화로 더욱 뿌리깊게 자리잡는다. 즉, 연애는 예술의 계기로서, 예술은 사랑의 교본으로서 서로에게 상승 효과를 발휘해 왔다. 이렇게 연애는 문학적인 감수성 깊숙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테리 이글턴의 말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낭만주의 시대의 뒤를 잇는 후예들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낭만주의 시대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 이후 사람들(post- Romanti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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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는 『한국 현대시 형태론』(1954)이라는 책에서 서정주와 유치환을 서구 낭만주의의 핵심에 도달한 시인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폐허》·《백조》에 있어서는 ‘분위기’뿐이었던 낭만주의가 이 두 시인에 의해 ‘정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경우의 ‘정신’은 ‘목숨’과 동의어로 쓰이는데, 생의 철학으로 표출된 니체적 낭만주의로서 유치환의 『청마시초』와 서정주의 『화사집』은 한국시사에서 서정의 깊이를 비쳐준 이면경二面鏡으로 기려지고 있다.
또 다른 맥락에서, 청마 유치환이 남긴 숱한 연애편지와 연시들도 낭만주의적인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아 씌어졌다. “마리아를 통해서 천주에게 이르듯이 내게 있어 이성은 고독한 밤 항해에 아득히 빛나는 등대불, 채울 수 없는 허망을 비치는 구원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구름에 그린다』, 1959)는 유치환의 고백은 ‘낭만적 동경’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낭만적 동경은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란 이미지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청마의 너무나도 유명한 시 「기빨」,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물질 아닌 심상 하나”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표ㅅ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그는 ‘깃발’처럼 그리워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깃발’이 나부끼듯이 그는 편지를 썼고 시를 썼다. 그의 두 편의 시, 「그리움」을 보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고 부르짖기도 하고,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즉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기빨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하고 방황하기도 한다.
정말로 그대는 뭍처럼 까딱하지도 않는 것일까? 정말로 그대가 꽃같이 숨어버린 것일까? 어쩌면 그가 그대를 뭍으로 호명한 것이며, 꽃처럼 숨긴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파도처럼 울부짖고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사랑의 방식이며 사랑의 ‘문학적’ 양태였다. 그는 스스로 깃대에 묶여 있었다. 깃대에 묶이지 않은 깃발은 백로처럼 날개를 펼 수 없으므로.
그는 잘 알려져 있듯이 엄청난 양의 연애편지를 남겼다. 청마는 습작시절 훗날 그의 부인이 될 한 소녀(권재순)에게 시를 쓰듯 열심히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1967년 교통사고로 홀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20여 년간 한 여인(이영도)에게 사과상자 세 상자를 채울 만큼의 편지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청마 사후에 그의 편지는 한 권의 책,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로 묶여 세상에 개봉되기도 했다. 청마의 열성적인 편지를 받은 또 다른 여인(반희정)도 있다. 그녀도 청마 사후에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이 수많은 편지들은 청마와 그의 연인들을 깃대에 매달린 깃발 같은 존재로 떠올리게 한다. 때론 잔잔하게 또 때로는 찢어질 듯 강렬하게 펄럭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들. 편지는 ‘떨어져 있음’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 ‘먼’ 사랑을 편지는 보조한다.
그러므로 청마는 「우편국에서」란 시에서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고 노래하기도 했다. ‘행복론’도 우체국 풍경으로부터 펼쳐진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전문
뒷줄 왼쪽부터 김광주, 김동리(가운데) ⓒ계간 시인세계 |
「일월」, 「생명의 서」, 「바위」 등과 함께 청마의 시는 도드라지게 남성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희귀한 예를 이룬다. 반면에, 흔히 청마의 연시는 그의 서정시인으로서의 감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와 대조적으로 혹은 갈등관계로 얘기되곤 했다. 실상 청마의 연시는 대중적으로 애송되긴 했지만 문학사적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위에 인용한 시는 숱한 연애편지에 인용되었을 것이다. 청마의 시인 줄은 모르지만, 이 시를 기억하는 이들도 꽤 많을 것이다. 청마가 읽히던 시대에도 문학작품은 연애의 참고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연애는 문학적인 향기를 뿜을 수도 있었으며 예술적인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운!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여성임이 얼마나 귀합니까. 생각하고 이해함이 여성의 덕에다 진정 아름다운 빛을 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와 같은 찬사는, “오늘도 나는 지극한 당신의 애정 앞에 나의 진실성을 따져 봅니다. 만에 하나라도 내게 당신의 슬프고 외로운 참된 애정을 받음에 한 점의 허위가 있다면 나는 마땅히 인간이 아니므로 죽어야 옳을 것입니다”와 같은 자기반성과 향상 의지로 연결되고, “내게로 밀려오는 당신의 밀물 같은 벅찬 애정을 나는 이렇게도 어찌할 도리 없이 공수拱手의 무능으로 답하고 있다니―생각할수록 슬픔과 그리움이 가슴을 후비듯 죄어듭니다.
이제 ‘운명運命’에 대하여 글을 하나 쓰렵니다”와 같은 예술적인 열정과 보답으로 이어진다.(『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생명의 서」와 「깃발」은, 혹은 「바위」와 「그리움」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동류의 힘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청마에게 사랑은 슈퍼 에고(Super-ego)에 견인되어 있다.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며, 환멸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이나 자학으로 빠진다.
‘낭만적인 사랑’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작동하긴 하지만, 20세기초에 시대적인 비전과 연결되었던 에너지는 끊어져 버렸다. ‘낭만적인 사랑’은 여전히 하나의 매혹이고 흥미롭지만 이미 진부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청마는 그 매혹을 너무나도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실천하여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지극히 고전적인 멜로가 되었다. 종종 ‘신화’와 ‘소문’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떤 이에게 청마의 사랑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은 이제 정말 ‘노스탤지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누군가는 ‘노스탤지어’의 힘과 믿음으로 펄럭이고, 또 누군가는 그로부터 힘겹게 혹은 쿨하게 탈주할 것이다. 또는 나는 다른 종족이며 내 사랑의 기원은 다른 데 있다고 엇갈리는 손가락을 뻗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듯이 같은 사랑도 없을 테지만, 더욱이 우리는 사랑의 감수성 혹은 연애의 감수성이 급격히 재편성되는 때에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있다. 근대적인 신화들의 운명이 대개 그러하듯이.
김행숙 1970년 서울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춘기』
모윤숙
황홀한 악몽 (허혜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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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의 내포적인 독자라고 할 수 있을 연인의 존재란, 미학적 측면에서 시의 독자임과 동시에 시인과 함께 호흡하며 시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한편의 시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 존재이다. 즉 시인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연인의 존재를 상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글쓰기를 추동시킨 에로틱한 욕망으로 인해 탄생한 특정한 표현과 수사 때문에 연인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한 미적 요소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 연인이 사회적인 관점에서 온당한 존재가 아닌 것으로 보일 때, 연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험이 될 수 있는 반윤리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으레 거기에는 저널리스틱한 흥미가 따라다니고, 모종의 연애사건이나 관계에 대한 주변인의 진술은 사실적인 허구를 구축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러한 문학작품의 특별한 예로, 영운嶺雲 모윤숙毛允淑의 『렌의 애가哀歌』를 자주 거론한다. 실상 『렌의 애가』는 시집이 아니라, 분방하고 격정적인 한 여성 시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노래한 강렬한 고백체의 낭만적인 수상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1937년 발간된 이 산문집은 전체적으로 일기체 연가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데 발간 당시부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은 잘 알려져 있다.1)
“사회의 제도나 관습을 뚫고 통속적인 말로 연애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40대에 있는 나로서는 그 뒤를 수습하기가 벅차기도 하고 더욱이 우리 사회가 허용하지를 않는다”2)라는 모윤숙 시인의 진술에서도 엿보이는 것처럼, 시인은 나름대로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시몬이 누구인가’에 대한 부당한 억측을 차단하기 위해 많은 변을 이후에도 쏟아놓았다. 이에는 『렌의 애가』에서 렌의 광적인 숭배자인 시몬이 다소 현실적 맥락을 비춰내고 있기에 그에 대한 변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3)
이 작품이 발간된 경위는 이러하다. 모윤숙이 시단에 등장하여 만나게 된 기혼남에 대한 사랑을 일기장에 기록하던 당시, 39년 어느날 조지훈이 모윤숙을 찾아와서 써두었던 일기와 서간문을 보여달라고 조른다. 모윤숙은 남에게 보이려고 쓴 글이 아니라고 거절했으나 조지훈은 끝내 그 원고들을 뺏어다가 자신이 관계하는 안국동의 일월서점에서 39쪽의 『렌의 애가』를 출판한다.
그 대담함과 솔직성으로 인해 당시 한국 시단에 대단한 충격파를 몰고 온 이 작품은, 한 기혼남을 사랑한 여성 렌의 갈등과 방황을 다룬 총 7부의 장을 통해, 거의 신앙의 경지와도 맞닿는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내용은 중년 남성 ‘시몬’에게 바치는 청순한 ‘렌’의 사랑노래인데, ‘렌Ren’은 아프리카 숲속에서 홀로 우는 새의 이름이다. 이 작품의 독특성은 무엇보다도, 혼외의 사랑이라는 반윤리적 코드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적 상징화를 취했다는 점에서 유발되고 있다. 즉 불륜이라는 반윤리적 사랑은 사회적인 가치와 모순되지만, 그러한 가치보다 상위에 있는 종교적 숭고화와 같은 사회적 상징화를 취함으로써, 보다 확장된 도덕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렌의 애가』의 주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육체를 가진 영혼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육체에 강조점이 두어지는 렌의 사랑노래는, 깊은 번민과 아슬아슬한 욕망의 곡예 끝에 결국 렌의 죽음으로 종결되는 다소 상투적인 마무리를 가지고 있다. 이에는 여성의 열정적인 욕망을 곧 ‘창녀성’으로 곧바로 재단해버리는 문화적 풍토 속에서의 예술적 곤경이 표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렌의 사랑에, 세속적 연애를 넘어서는 종교적 이상화와도 같은 도덕적 거울을 포개놓는다.
“한 여자의 최대의 선과 행복은 위대한 피의 흐름을 가진 한 사람의 완전한 소유가 되는 때에 실현된다고 봅니다.”4)라는 렌의 고백은, 한 남성에 종속되길 갈망하는 지극한 여인의 심경을 비춰낸다기보다는, 진정한 존재의 완전성에 귀속되고자 하는 예술적 열정의 표현으로 읽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위대한 피’라는 말에는, 렌의 사랑에의 열정이 세속적 완전성을 넘어서는 숭고한 무엇임이 암시되어 있다.
시가 시인에게 지고의 연인일 수 있듯이, 시몬에 대한 전적인 귀속은 렌의 사랑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 영혼까지 귀속시킬 수 있는 절대에 대한 갈망을 표명하는 부분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렌의 애가』 속에는, 연애라는 현상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한국의 사회 문화적 전체성 안에서 그리고 시인 자신의 세계관과 시대비판의 연장선상에서 고찰되어야 할 인간관과 사회적 이념이 함께 숨쉬고 있다. “살아서 마음이 변한 남편이나 애인보다 사랑하다 그대로 죽어버린 남편이나 애인이 얼마나 더 고귀하고 영원하냐? 사랑 속에 생명을 태우다 사랑 속에 사라져간 생명이란 얼마나 높은 운명의 심볼이냐?”5)라는 시인의 말에서, 우리는 연애에 대한 시인의 인식과 사고를 잘 읽어낼 수 있다.
모윤숙이 ‘어느 한국인에게도 비길 수 없는 완전한 시대인’6)으로 창조한 시몬은 강함과 약함, 선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어느 순간 자신의 진실을 배반할 수도 있는 흠 많은 남자로 나타난다. 『렌의 애가』의 제7부 「죄스러운 기록」에는 시몬이 가진 선악의 양면적인 얼굴이 고발되어 있고 렌의 지고의 숭배대상이었던 시몬의 그늘진 구석이 묘사되어 있다. 가령, 시몬의 아내가 와 깨뜨려놓은 가구를 바라보며 부서진 가구의 파편보다 ‘마음에 흩어진 신앙의 파편’을 더욱 아파하는 렌의 실망감조차 숨김없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그토록 위선적이고 허약한 남성을 구원의 성상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렌의 사랑이며, 그의 그늘진 모습마저 인간 존재의 본질로 껴안으려는 렌의 내면적 성숙에 의해 시몬은 인간의 존재적 상황과 그 승화의 필연성을 독자에게 제고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품을 통해 보면 시몬은 렌에게 정신적 육체적 안정을 부여해주는 존재이며 렌의 이상이 투영된 강한 의지와 이지를 가지고 그녀를 지고의 존재로 상승시켜주는 존재이다.
성서의 ‘시몬 베드로’에서 그 이름을 차용한 시몬은, 베드로만큼이나 인간의 긍정성과 부정성의 폭넓은 인격적 스펙트럼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연인에 대한 순수함과 그를 배반하는 비겁성, 또 현실의 알력 앞에 쉬이 허물어질 수 있는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혼외의 여자에게 몰입하면서도 그러한 욕망을 은폐하는 한국 남성의 비겁하고 위선적인 면모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모순적 초상이다. 그러나 렌은 “박해와 절망에 걸려 당신의 생명이 더러워졌어도 나는 홀로 그 더러워진 생명을 껴안고 행복하려 하나이다”7)라는 고백을 할 정도로 그의 오탁까지 껴안는 절대의 사랑을 표현한다.
『렌의 애가』 뒤에는 신문학기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광수를 둘러싼 풍문이 일었는데, 이에는 “연령이 높은 스승격인 분에게서 신비로운 감흥을 받았다”는 시인의 변이 그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작품 속의 연인은 해방기의 친일적 행각으로 야유와 비난의 과녁이 된 이광수의 이미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제기된 다른 관련 증언도 있으나8), 문제는 시몬이 누구를 의미하느냐가 아니라, 렌의 애가 속에 나온 연인이 어떤 이미지로 그려졌는가 하는 것일 터이다.
시인이 작품에서 이미 이상형으로 완성된 지고의 연인이 아니라 그의 결함과 한계에 대한 정신적 갈등에 주목했다면, 이는 바로 현실적 공간 안에 놓여 있는 인간의 절박함과 존재의 위기에 시선을 돌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던져야 할 의문은,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이, 시몬을 추상적인 연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대단히 구체적인 실제 인물의 이미지로 실현시키게 한 동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문학적 질문이다.
문학이 사랑을 노래하는 것은, 결코 날것의 감정토로나 열정의 추상적인 숭고화가 아니며, 인간의 존재론적 속성과 핵심을 가장 예민하게 짚어낼 수 있는 구체적 지점이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시몬의 이미지는, 단순한 개인적 연애사건의 묘사와 진술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그의 문학적 비전의 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강한 열정과 욕망을 가진 존재가 사회에 의해 찢겨지거나 파멸적인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낭만주의 문학의 일반적인 종막이다. 그것을 신성한 구원적 사랑이라는 보편의 코드로 승격시키고자 했던 시인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 잘 나타나고 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높고 깊어 다할 길 없는 그리움!
사랑보다 더 높임을 받을 구원의
미소와 신의!
이것이 당신을 위한 당신과 나의
내부입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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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사회의 지탄 속에 쓸쓸하게 고립된 연인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플롯을 예비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에 굴복하거나 항복하지 않고 거기서 이탈함으로써 사랑의 순결을 끝까지 지켜가는 순례자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시킨다.
마지막 순간까지 시몬을 갈망하던 렌은 시몬을 만나지 못한 채 먼 해변가의 병상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사랑의 야상곡은 곧 장중한 장송곡으로 변함으로써 독자는 더욱 렌의 사랑 이야기를 일종의 신앙고백처럼 엄숙하게 읽게 된다. 사회에서 고립되고 거세된 한 존재의 침묵은, 세상의 논리가 통치할 수 없는 건너편 땅으로 굽이치는 망각의 강물처럼 그를 새로운 우주로 데려다준다. 법과 윤리와 관습으로 만들어진 세상이란 온실은 싸늘한 번민의 혹풍 속에 날려가고, 마른 겨울 숲을 떠나는 새처럼 렌의 영혼은 지상에서 걷히운다. 지상에 위탁된 렌의 영혼은, 타락한 사회의 위선의 옷깃을 벗어버린 벌거벗은 가슴으로 충실히 자신의 운명인 노래를 불렀고, 사랑은 노래로의 충실한 안내자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신에게로 돌아가는 초인종처럼 황홀한 악몽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1) 모윤숙 시인이 '렌의 哀歌'를 발간했을 때 그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렌의 哀歌'는 닷새만에 매진됐고 나머지 일기도 읽게 해달라는 독자들의 성화가 빗발쳤다. 유진오는 이 작품을 ‘한국판 좁은 문’, 여자 쪽에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찬사를 던졌다. 이와같은 엄청난 반응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한 여성 시인의 사생활에 대한 지나친 저널리스틱한 관심은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본래 이 작품은 1936년 ?여성(女性)?지 4월호부터 연재되었고, 1937년 일월서방(日月書房)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저자의 제1시집 '빛나는 지역'에 이어 나온 책이므로 흔히 두 번째 시집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초판본에는 분명히 산문집으로 되어 있다. 4 ․6판은 40면 내외였으나, 광복 후의 재판본(一文書館, 1951. 9)에는 그동안 내용이 추가되어 346면이 되었고, 1978년까지 53판을 간행했으며, 1954년도에는 가장 인기가 높았던 베스트 셀러로서 약 5만 부나 팔렸다.
2) '시몬은 누구인가' 甲寅出版社. 1977. 108쪽
3) 모윤숙이 북간도의 명신여고에서 교편을 잡다가 31년 서울 배화여고로 옮기면서 월간 '삼천리'기자, 중앙방송국 기자로 일하던 그 해 12월 '동광'에 시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발간했을 때 춘원(春園) 이광수는 그 시집의 서문에서 “여사는 조선의 땅을 안으려 하는 시인이다. 검은 머리를 풀어 허리를 매고 조선의 제단에 횃불을 켜놓으려 한다고 외치는 시인이다”고 치켜 세우면서 “조선의 시인인 것을 감사하려 한다”고 모윤숙을 크게 반기는 등 그와의 친분은 항간이 익히 알려져 있다.
4) '렌의 哀歌' 中央出版公社. 1978. 83쪽
5) '포도원' 一文書館, 1962, 20쪽
6) “한국 남성의 애정이란 옛날부터 사무적인 애정이요, 형식적인 윤리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기에 그들의 낭만은 대개 아내 아닌 다른 대상에게 빗나가기 마련이다”라는 그의 진술은 시인이 통찰한 시몬의 이율배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어두운 면을 비춰주는 통찰력있는 진단이다. ('시몬은 누구인가' 甲寅出版社. 1977. 39쪽)
7) '렌의 哀歌' 112쪽
8) 그 시몬이 의사 김영이라는 주장은 '상하이 올드 데이스'( 민음사)에서 제기되고 있다. 책에 따르면 김염의 첫째 형인 김영(본명 김덕봉․1903~1937)이 '시몬'이라는 것. 책의 저자 박규원은 에필로그에서 어머니와 친척들의 말을 인용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모윤숙 시인은 외할아버지(김영) 아내의 여동생 친구였으며, 모 시인이 이화여 전을 졸업하고 만주의 명신여학교로 왔을 때 외할아버지가 따뜻 하게 맞아주었다”고 전했다. 제창병원의 원장이었던 김영은 룽징(龍井)의 유지로 명신여학교 행사에 자주 참석, 조회 때 학생들을 상대로 훈화도 했다는 것. 이 과정에서 모시인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됐던 것으로 책은 추정하고 있다. 같은 병원에 근무하던 미스터 블랙이 김영의 부인에게 '닥터 김과 모윤숙 씨가 가깝게 지내니 잘 살펴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들의 회고에 따르면, 한번은 김영이 일찍 집에 들어와 방에서 편지를 읽다가 부인이 따라 들어오자 얼른 감추었다. 그 편지가 모 시인이 김영에게 보낸 것으로 '렌의 哀歌'의 앞부분이었다고 책은 밝히고 있다.
9) '렌의 哀歌' 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