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박인환---

poongkum 2008. 1. 20. 12:40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박인환(1926∼1956)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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